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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량의 역사적 배경

노량 해전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입니다.

 

왜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따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되자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

정유재란 중 일본 본토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한반도에 주둔하던 왜군이 모두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후 왜 교성에서 이순신장군의 부대에 포위된 상황이었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 내내 한반도를 유린한 왜적을 순순히 돌아가게 할 수는 없다며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일본군 다수가 궤멸했지만 이순신장군 마저 전사하게 됩니다

 

2. 노량 죽음의 바다 줄거리

임진왜란 발발로부터 7년이 지난 1598년 12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이순신은 적의 수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들이 조선에서 황급히 퇴각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들을 섬멸하는 것이 전쟁을 바르게 끝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이순신은 왜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 자신의 군사들, 그리고 명나라와 조명연합함대를 꾸려 퇴각로를 막고 적들을 섬멸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뇌물 공세에 넘어간 명나라의 도독 진린은 왜군에게 퇴로를 열어주려 하고 설상가상으로 왜군의 수장 시마즈의 살마 군까지 퇴각을 돕기 위해 노량으로 향하게 되고 3국의 결전이 시작된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시마즈 군을 맞으러 노량으로 출정한다 드디어 사마즈 군은 조선 수군 함대와 조우하게 되고, 그 옆에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북쪽에서 가만히 대기를 하고 있었다. 시마즈는  칠천량 해전에서 노획한 조선군 화포를 끌고 와 불타는 배들에게 포격을 퍼부어 버리고 거북선마저 침몰해 보리자 시마즈 군의 사기는 크게 오른다.

선봉대인 토요히사 함대가 조선 함대에 고전하고 명이 함대까지 개입하자, 속히 저들을 도우러 가야 한다는 말에  시마즈는 남해 바다의 바닷길이 열려 있으니 저기로 이순신을  꾀어내 고니시와 협공하겠다며 전속력으로 그쪽으로 향한다. 이를 본 이순신은 천천히 쫒고 진린과 명군 부하들은 명군이 나서니 적들이 물러난다며 기뻐한다

전속력으로 전진하는 중 이상함을 느끼고 보니 그 앞에 관음포라는 막다른 포구가 있었고, 움푹 파인 모양의 지형에 시마즈의 전군이 꼼짝없이 갇히고 만다 이순신이 진격하려 하자 진린이 놓아주자고 하고 이순신은 조선 수군만으로 적들을 섬멸할 테니 조심히 돌아가라고 말하며 전의를 불태운다.

밤새 지독한 전투를 치르며 아침이 다가오는데 이순신은 일출과 함께 대장선에서 벌어지는 백병전을 바라보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북채를 잡아 직접 북을 크게 치며 아군의 사기를 북돋기 시작한다

이에 다들 힘을 얻어 싸우고 마침내 조명연합수군은 승리한다

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이순신의 장례식이 열린다 

 

3. 이순신장군의 노량 해전의 감상평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라나니, 부디 적들을 남김없이 무찌르게 해 주소서. 이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이 한 몸 죽는다 한들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조선 수군 희생자 명부에 적힌 이들을 회상하며 이순신장군이 올린기도라 한다

이 말 외에 무슨 다른 할 말이 있을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나라와 백성을 내 몸보다 사랑한 조선의 태양이다